괴담을 생성하는 게임

괴담을 생성하는 게임

룹앤테일

Oct. 2023.

웹진 <즐거운 곤란> 수록

자정이 지나고 탄천 주변을 산책하는 버릇은 판데믹 기간부터 시작되었다. 잠시나마 마스크를 쓰지 않으려고 인적 없고 정돈되지 않은 그곳을 걸어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곳은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으로 무성한 수풀과 공사 현장때문에 산책길 밖으로는 사람이 들어서기 힘든 곳이었다. 인간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작된 산책길은 한동안 미지의 대상들로 두려운 공간이기도 했다. 갑자기 수풀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와 본 적 없는 벌레들, 알 수 없는 울음소리들, 파충류인지 양서류인지 모를 것들이 가로등의 어스름한 빛 아래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개 한 마리를 마주쳤다. 유기견으로 보이는 그를 매일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다른 미지의 존재들과는 다르게 그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그에게 먹이를 가져다줬고 그곳에서 한두 시간을 머물렀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외에는 인적이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 몇 주 지나자, 그는 밥을 먹고 나서도 수풀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았다. 가끔은 쓰레기를 주워 와서 혼자 놀기도 했다. 그를 만나면서 수풀 속의 고양이들, 너구리들, 고라니들이 먹이를 찾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천의 범람으로 우리가 만나는 장소가 흔적도 없이 물속에 잠겨 있었을 때 수면에서 들리던 알 수 없는 소리와 그림자들, 물이 빠지고 난 후 곳곳에 찍힌 개의 발자국에서 느꼈던 안도감. 하나둘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던 낯익은 모습들. 그는 몇 주씩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놓아둔 물이 금세 얼어붙는 한파가 왔을 때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오늘도 나와 있을까. 그 산책길은 또 다른 형태의 두려움과 죄책감의 장소가 되었다.

룹앤테일은 게임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에 대해 연구하고, 주제에 관해 게임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고민한다. 플레이의 과정을 통해서 공유하고자 하는 질문들이 전달되고 플레이어 각자가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의 단계를 거치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위로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특히 일상과 단절되는 게임 플레이가 아니라 일상의 문제들을 게임 안에 담고자 한다. 몇 년 동안 지속된 산책의 경험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만드는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 

온갖 추측과 어두운 상상이 현실의 이미지와 겹쳐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 밤의 탄천 지역을 방문하면서, 실체가 없지만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한 도시괴담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에게 이 한밤중의 산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들에 대한 도시괴담을 함께 만들었다. 믿기 힘든 일화들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로어 형식의 글은 가짜뉴스만큼이나 설득력 있게 쓰여야 하고, 뭐든 그럴법하게 써내는 ChatGPT에게 이 형식을 습득하도록 했다.

우리는 [Ro(로)]라는 전시를 구성하면서 네 개의 방과 세 개의 게임을 만들었다. 오피스 빌딩을 배경으로 한 “위험한 오피스”와 도심의 개발제한구역을 배경으로 한 “평화로운 황무지”를 돌아다니며 이야기의 조각들을 수집하면 “허브” 공간의 인공지능(ChatGPT)이 실시간으로 그에 해당하는 괴담을 만들어 주는 형식이었다. “출입금지구역”에서는 도슨트 역할을 하는 ChatGPT와 대화할 수 있었다. 

전시 관람을 위한 지시사항: 위험한 오피스, 평화로운 황무지, 허브, 출입금지구역 순으로 플레이하기를 권장한다.
“위험한 오피스”: 아침 10시에 A가 출근한 회사. 복도를 없애고 대신 모든 방을 문으로 연결한 오피스 빌딩. 회의실을 찾아가는 인턴이 마주치는 괴담같은 노동자의 공간들.
“평화로운 황무지”: 밤 10시에 A가 도달한 곳.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에서 나무와 풀을 베고, 돌을 깨서 길을 만들 수 있다.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의 속삭임이 존재한다.

탄천의 산책길은 “평화로운 황무지” 게임 씬에 담겨있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생명체들과 마주치면 다음과 같은 로어 형식의 괴담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돼지는 굉장히 똑똑한 나머지 사람들의 말을 엿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부위가 자기 몸 어디쯤인가를 가끔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똑똑한 소에게서도 간혹 일어나는 현상입니다.”“고라니의 울음소리가 인간의 비명과 흡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간혹 아주 청아한 울음소리를 가진 고라니도 있는데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배우기 위해 인간이 사는 곳 가까이 오기도 합니다.”
“목을 잘라낸 뒤에도 머리 없이 10분 정도를 뛰어다닐 수 있는 닭의 이야기는 상당히 유명합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을 때 닭의 머리를 만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다시는 닭고기를 먹지 못했습니다.”“누군가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서 집으로 데려갔는데 얼마 안 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깊이의 수조에서 개구리가 없어졌습니다. 그 뒤부터 그는 밤마다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 달 뒤 그는 말라비틀어진 개구리를 침대 매트리스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크래커를 개발하던 누군가가 크래커를 씹을 때 달팽이를 밟게 되면 나는 소리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고 그 크래커는 특히 비 오는 날 많은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유기견들만이 인간에게 발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면 사람들은 점점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예 없다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도심에서 잠자리가 잘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5G 전자파 때문이라는 것이 연구 결과로 밝혀졌지만, 루머로 치부되었습니다.”“폐쇄된 재활용품처리장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화분이 하나 있었는데 실내에 두고 간 바람에 비가 올 때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이 화분을 밖으로 옮겨 놓았는데 인간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벤치에 어느 노숙자가 누워있었습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반드시 우산이 펴져 있다고 합니다. 하천 범람으로 잠겼던 그곳의 물이 빠지고 나서 보니 그는 그대로 우산을 쓴 채 누워있었다고 합니다.”“도심의 개발제한구역에는 유기된 동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역으로 인간이 들어올 때 음식을 얻어먹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가에 37일 동안 장마가 이어지면서 인간의 통행이 금지되었는데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살아남았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비 오는 날 달팽이를 밟았을 때 나던 소리, 골목길에 남아있는 핏자국에서 얼마 전 마주친 고양이를 떠올리는 것, 아슬아슬하게 차도를 걸어가는 비둘기를 마주쳤던 것, 어릴 적 잡아 온 개구리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던 기억, 짧은 줄에 묶인 개의 빈 물그릇을 보았던 것, 말라 죽은 화분 식물을 버렸던 것 등 누구나 경험할 수 있거나 기억하는 것들에 대한 감정들이 이 짧은 괴담들 안에 담겨있다.

“허브”: 인공지능 Ro(로)와 게임을 플레이한다. 플레이어가 그를 한 번 움직이게 할 때마다 그는 위험한 오피스나 평화로운 황무지에서 A가 겪은 일에 대해 자신이 재구성한 괴담 하나를 들려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A라는 캐릭터를 이동시키면서 길을 찾는다.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해 어떤 문을 통과할지를 고민하거나 나무를 베어버리면서 이동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존재들의 흔적은 일종의 이야기 조각이 된다. 이야기 조각을 찾아내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 그 조각들을 어떻게 변형하는가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위험한 오피스”와 “평화로운 황무지”에서 A가 겪었던 일들을 아주 먼 훗날 “허브”에 남은 인공지능 Ro(로)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처럼 누군가 어느 시점에서 겪었음 직한 사건들이 플레이를 통해 발견한 이야기의 조각들 사이에서 불쑥 찾아오기를 바랐다. 

특정한 경험이나 이야기가 다른 버전으로 재생산되는 괴담은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 다양한 층위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 도심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관계 속에서 부당하다고 느껴졌던 일들은 실제와 상상의 경계에서 괴담이 된다. 괴담을 발생시키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일상적인 경험을 돌아보게 하고자 했다. 어떤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을 수도 있는 순간들 – 인간이 아닌 생명종들을 조우한 그 순간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