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①]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①]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07 August 2014 / Cologne*
*published in 똑똑 talk talk 커뮤니티와 아트 magazine*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비디오게임과 현대예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비디오게임은 예술인가 아닌가를 화두로 꺼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라는 대답 이상이 나올 수도 없는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을 미술관에서 아카이빙하거나 전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게임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든 작은 게임들이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하나 더 생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위 “아트게임”류로 불리는 비디오게임의 장르 중에서는 미디어아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향유되는 게임들이 있고, 게임엔진이나 기존의 비디오게임이 미디어아티스트에 의해 변용되어 다른 의도를 지니게 된 작품들도 있다. 즉 어떤 것이 어디서 어떻게 보여지고 소비되느냐의 맥락에 따라 비디오게임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의 비디오게임 아카이빙 및 전시는 미술사 안에서 비디오게임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출발한다. 게임문화를 다룬 현대미술 작품이나 예술장르로서의 비디오게임 등 대상은 다양하다. 코라도 모르가나는 아트게임(Artgame)과 게임 아트(Game Art)를 구분하는데, 아트게임(Artgame)은 플레이 매커니즘이나 서사 전략, 시각적 언어에서 예술성을 보여주는 게임이며, 게임 아트(Game Art)는 게임 속성이나 언어를 사용/남용/오용한 예술작품이다 (, 2010). 하지만 이 두 용어는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고 비디오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이름 아래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2012년부터 시작된 뉴욕 MoMA의 게임 아카이빙은 어떠한 게임을 어떤 형식으로 미술관에 가져다 놓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독일의 경우, ZKM에서 9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게임을 전시에 포함시켰고, 2013년에는 “비디오게임과 실험적 형태의 플레이”라는 주제로 ZKM_Gameplay라는 상설전시를 만들었다. 큐레이터인 슈테판 슈빈겔러는 게임이란 오디오비주얼을 다루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며 컨트롤 가능한 이미지라고 정의했는데, 그 정의만큼이나 전방위적으로 게임을 선정하는 듯하다. 팩맨이나 퐁과 같은 클래식 게임과 오래된 게임기들이 한쪽 구석에 수줍게 자리하고 있고, 게임을 변용한 Jodi의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 작품들, 현대미술과 미술관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는 Arsdoom(1995)과 같은 게임도 있다. Fez(2012)나 Journey(2012)와 같이 잘 알려진 인디게임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결합한 Susigames(2003-12)이나 Room Racers(2010)같은 게임 앞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다.

SOD (1999)

Arsdoom(1995)
Journey(2012)

Room Racers(2010)
여타의 비디오게임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는 새로운 게임 장르는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도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쾰른의 낫게임즈(Notgames) 페스티벌, 베를린의 어메이즈(A MAZE)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예이다. ZKM은 어메이즈 페스티벌과 연계해서 수상작들을 전시 공간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전시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재미만으로 볼 때야 미술관보다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의 경우가 훨씬 낫다. 백여 개의 새로운 게임들 사이에서 맥주병을 들고 잔뜩 흥분한 게이머들과 부대끼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에서 게임을 접할 때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건 뭘까? 책은 도서관에서, 영화는 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는 것처럼 게임은 게임박물관에서 소장해야 할까? 베를린의 게임박물관(Computerspielemuseum)에서는 각종 게임기들과 함께 게임의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게임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락적 미디어로서의 게임에 중점을 두고, 독일의 오래된 인터랙티브 텔레비전 프로그램(Telespiele 등)도 함께 소개한다. 게임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그림으로 봤던 게임들을 직접 해보는 재미도 있다. 기존의 게임을 변용한 아트게임인 ROM Check Fail(2008)이나 게임의 패자를 물리적으로 응징하는데 악명 높은 Painstation(2001) 같은 작품들은 유원지처럼 꾸며놓은 아케이드 룸 바로 옆에서 전시되고 있다. 규모나 전시 형식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미술관의 게임 아카이빙이나 상설전시가 다루고 있는 게임들이 게임박물관과 상당 부분 겹친다.
Painstation(2001)
A MAZE 2014
다양한 게임을 경험해볼 수 있는 전시들도 있지만, 게임을 멈추고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도 있다. 특히 미디어로서의 게임에 대해 성찰하는 전시에 비디오게임이 없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시리어스 게임즈(Serious Games, 2009-2010)는 게임미디어에 대해 다룬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연작으로,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Serious Games I: Watson is Down은 전쟁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는 군인들을 보여준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환경을 보면서 실제처럼 무전을 치고 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 앞에 왓슨의 아바타가 죽어 넘어지고 그들은 덤덤하게 왓슨이 죽었다고 교신한다. Serious Games II: Three Dead 는 게임 환경을 실제 환경에 재매개한 듯이 세워진 야외 세트와 NPC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들로 구현된 훈련 상황을 보여준다. 총격이 일어나고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은 도망친다. 카메라는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떠나버린 빈 테이블을 한 동안 비춘다. 행위자가 모두 떠난 텅 빈 자리는 게임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Serious Games III: Immersion은 가상 환경으로 전후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 군인은 기억 속의 상황과 비슷하게 재현된 게임 환경을 보고 ‘맞아요, 그 때의 풍경도 이렇게 초현실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Serious Games IV: A Sun with No Shadow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과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시뮬레이션 화면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치료를 위한 가상환경은 상대적으로 낮은 예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교한 인공 태양이 사용되지 않고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바타들은 유령처럼 3D 환경을 떠다닌다.
전쟁과 미디어 발전의 관계에 대한 키틀러식의 해석으로 파로키의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미디어 비평으로 읽혔다. 게임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과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의 대비를 통해 게임이 어떤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주기도 했다. 특히 Serious Games III: Immersion에서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쓴 군인의 시선을 보여주는 첫 번째 스크린은 실제처럼 구현된 가상 환경 안에서 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터, 하늘이나 땅의 한 조각에 머물고 있었다. 구토할 것 같다며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을 때 작가는 첫 번째 스크린을 암전시킨다. 가상의 이미지는 이미 기억이 만들어낸 심적인 이미지에 의해 먹혀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들은 기억을 환기시키려는 용도로 사용될 뿐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erious Games I
Serious Games III
Serious Games III
Serious Games IV
실재하지 않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다룬 파로키의 작품은 그와 다른 접근을 보여주는 인디게임 Continue?9876543210을 떠올리게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게임 퀘스트에 실패한 후 게임이 종료된 지점에서 시작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곧 사라질 메모리 캐시에서 떠도는 전우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 뒤의 광대처럼 지쳐있다. 퀘스트를 실패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인 것을 자책하며 용서를 구하는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동료들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사라져가길 권한다. 그래서 다시 게임이 시작될 때 그들은 기억 없는 존재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있지? 글쎄, 코드의 라인 위에 있는 거겠지. 랜덤 액세스 메모리를 목적 없이 방황하면서,” 라는 캐릭터들의 대사는 Continue?9876543210가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기억은 하룬 파로키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기억과는 달리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이며, 그 기억 자체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것은 회화에 대한 전시, 디지털아트에 대한 전시라는 말처럼 곧 무의미해질 것이다. 매해 영리한 게임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양한 비디오게임을 미술관에서 맥락 없이 소비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게임 미디어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을 담은 전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러한 전시를 경험하면서 게임 바깥에서 게임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새로운 게임으로 담아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김영주 / 독일 쾰른에 거주중인 인디 게임 디자이너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①]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07 August 2014 / Cologne*
*published in 똑똑 talk talk 커뮤니티와 아트 magazine*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비디오게임과 현대예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비디오게임은 예술인가 아닌가를 화두로 꺼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라는 대답 이상이 나올 수도 없는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을 미술관에서 아카이빙하거나 전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게임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든 작은 게임들이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하나 더 생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위 “아트게임”류로 불리는 비디오게임의 장르 중에서는 미디어아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향유되는 게임들이 있고, 게임엔진이나 기존의 비디오게임이 미디어아티스트에 의해 변용되어 다른 의도를 지니게 된 작품들도 있다. 즉 어떤 것이 어디서 어떻게 보여지고 소비되느냐의 맥락에 따라 비디오게임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의 비디오게임 아카이빙 및 전시는 미술사 안에서 비디오게임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출발한다. 게임문화를 다룬 현대미술 작품이나 예술장르로서의 비디오게임 등 대상은 다양하다. 코라도 모르가나는 아트게임(Artgame)과 게임 아트(Game Art)를 구분하는데, 아트게임(Artgame)은 플레이 매커니즘이나 서사 전략, 시각적 언어에서 예술성을 보여주는 게임이며, 게임 아트(Game Art)는 게임 속성이나 언어를 사용/남용/오용한 예술작품이다 (, 2010). 하지만 이 두 용어는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고 비디오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이름 아래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2012년부터 시작된 뉴욕 MoMA의 게임 아카이빙은 어떠한 게임을 어떤 형식으로 미술관에 가져다 놓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독일의 경우, ZKM에서 9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게임을 전시에 포함시켰고, 2013년에는 “비디오게임과 실험적 형태의 플레이”라는 주제로 ZKM_Gameplay라는 상설전시를 만들었다. 큐레이터인 슈테판 슈빈겔러는 게임이란 오디오비주얼을 다루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며 컨트롤 가능한 이미지라고 정의했는데, 그 정의만큼이나 전방위적으로 게임을 선정하는 듯하다. 팩맨이나 퐁과 같은 클래식 게임과 오래된 게임기들이 한쪽 구석에 수줍게 자리하고 있고, 게임을 변용한 Jodi의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 작품들, 현대미술과 미술관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는 Arsdoom(1995)과 같은 게임도 있다. Fez(2012)나 Journey(2012)와 같이 잘 알려진 인디게임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결합한 Susigames(2003-12)이나 Room Racers(2010)같은 게임 앞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다.

SOD (1999)

Arsdoom(1995)
Journey(2012)

Room Racers(2010)
여타의 비디오게임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는 새로운 게임 장르는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도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쾰른의 낫게임즈(Notgames) 페스티벌, 베를린의 어메이즈(A MAZE)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예이다. ZKM은 어메이즈 페스티벌과 연계해서 수상작들을 전시 공간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전시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재미만으로 볼 때야 미술관보다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의 경우가 훨씬 낫다. 백여 개의 새로운 게임들 사이에서 맥주병을 들고 잔뜩 흥분한 게이머들과 부대끼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에서 게임을 접할 때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건 뭘까? 책은 도서관에서, 영화는 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는 것처럼 게임은 게임박물관에서 소장해야 할까? 베를린의 게임박물관(Computerspielemuseum)에서는 각종 게임기들과 함께 게임의 역사에서 특기할만한 게임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락적 미디어로서의 게임에 중점을 두고, 독일의 오래된 인터랙티브 텔레비전 프로그램(Telespiele 등)도 함께 소개한다. 게임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그림으로 봤던 게임들을 직접 해보는 재미도 있다. 기존의 게임을 변용한 아트게임인 ROM Check Fail(2008)이나 게임의 패자를 물리적으로 응징하는데 악명 높은 Painstation(2001) 같은 작품들은 유원지처럼 꾸며놓은 아케이드 룸 바로 옆에서 전시되고 있다. 규모나 전시 형식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미술관의 게임 아카이빙이나 상설전시가 다루고 있는 게임들이 게임박물관과 상당 부분 겹친다.
Painstation(2001)
A MAZE 2014
다양한 게임을 경험해볼 수 있는 전시들도 있지만, 게임을 멈추고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도 있다. 특히 미디어로서의 게임에 대해 성찰하는 전시에 비디오게임이 없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시리어스 게임즈(Serious Games, 2009-2010)는 게임미디어에 대해 다룬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연작으로,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Serious Games I: Watson is Down은 전쟁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는 군인들을 보여준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환경을 보면서 실제처럼 무전을 치고 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 앞에 왓슨의 아바타가 죽어 넘어지고 그들은 덤덤하게 왓슨이 죽었다고 교신한다. Serious Games II: Three Dead 는 게임 환경을 실제 환경에 재매개한 듯이 세워진 야외 세트와 NPC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들로 구현된 훈련 상황을 보여준다. 총격이 일어나고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은 도망친다. 카메라는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떠나버린 빈 테이블을 한 동안 비춘다. 행위자가 모두 떠난 텅 빈 자리는 게임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Serious Games III: Immersion은 가상 환경으로 전후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 군인은 기억 속의 상황과 비슷하게 재현된 게임 환경을 보고 ‘맞아요, 그 때의 풍경도 이렇게 초현실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Serious Games IV: A Sun with No Shadow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과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시뮬레이션 화면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치료를 위한 가상환경은 상대적으로 낮은 예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교한 인공 태양이 사용되지 않고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바타들은 유령처럼 3D 환경을 떠다닌다.
전쟁과 미디어 발전의 관계에 대한 키틀러식의 해석으로 파로키의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미디어 비평으로 읽혔다. 게임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과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의 대비를 통해 게임이 어떤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주기도 했다. 특히 Serious Games III: Immersion에서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쓴 군인의 시선을 보여주는 첫 번째 스크린은 실제처럼 구현된 가상 환경 안에서 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터, 하늘이나 땅의 한 조각에 머물고 있었다. 구토할 것 같다며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을 때 작가는 첫 번째 스크린을 암전시킨다. 가상의 이미지는 이미 기억이 만들어낸 심적인 이미지에 의해 먹혀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들은 기억을 환기시키려는 용도로 사용될 뿐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erious Games I
Serious Games III
Serious Games III
Serious Games IV
실재하지 않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다룬 파로키의 작품은 그와 다른 접근을 보여주는 인디게임 Continue?9876543210을 떠올리게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게임 퀘스트에 실패한 후 게임이 종료된 지점에서 시작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곧 사라질 메모리 캐시에서 떠도는 전우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 뒤의 광대처럼 지쳐있다. 퀘스트를 실패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인 것을 자책하며 용서를 구하는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동료들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사라져가길 권한다. 그래서 다시 게임이 시작될 때 그들은 기억 없는 존재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있지? 글쎄, 코드의 라인 위에 있는 거겠지. 랜덤 액세스 메모리를 목적 없이 방황하면서,” 라는 캐릭터들의 대사는 Continue?9876543210가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기억은 하룬 파로키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기억과는 달리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이며, 그 기억 자체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것은 회화에 대한 전시, 디지털아트에 대한 전시라는 말처럼 곧 무의미해질 것이다. 매해 영리한 게임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양한 비디오게임을 미술관에서 맥락 없이 소비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게임 미디어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을 담은 전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러한 전시를 경험하면서 게임 바깥에서 게임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새로운 게임으로 담아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김영주 / 독일 쾰른에 거주중인 인디 게임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