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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리 밑, 0시, 알아봄] 비평 모임

    기획: 이다영

    글: 박이선, 이다영, 이소요

    2023

    룹앤테일 [다리 밑, 0시, 알아봄] 전시 (포스터디자인: 유나킴씨)

    0.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다영)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9월의 어느날, 나는 이소요 작가, 박이선 기획자와 함께 룹앤테일 개인전 《다리 밑, 0시, 알아봄》 전시장을 찾았다. 룹앤테일의 이번 전시 내용을 듣고,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두 분을 초대한 자리였다. 게임 디자이너이자 미디어아티스트 듀오 룹앤테일(Loopntale)은 비디오 게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호작용적 행위 메커니즘을 다각적인 매체 실험을 통해서 작품으로 구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관람객이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관람행위(Play)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발견하길 원하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로 작품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추구한다. 이번 전시에 대한 비평 모임은 룹앤테일의 작품 활동 지향점과 나의 지난 경험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나는 지난 시간 예술학교의 부설기관 연구원으로서 예술에 입문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주제를 탐구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적절한 표현 매체를 선택하고 실험하는 창작 과정을 ‘주제 접근 – 표현 매체 실험 – 비평’으로 단계화한 융합적 창작 교육 방법을 연구하고 기획-실행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비평적 대화, 즉 ‘창작자의 관점은 무엇인지, 그 관점은 어떤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며, 선택한 표현 매체는 무엇이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어떤 연결점을 찾아볼 수 있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나누고 비평할 수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이유는 작품이 일정한 기간동안 관람객을 만나는 전시의 물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들의 관점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연구되기를 추구해야 작가의 관점이 작품과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밑, 0시, 알아봄》은 작가가 ‘탄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 지역을, 주로 자정에 산책하면서 겪은 경험에서 생겨난 이야기를 아트게임 작품 6점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작가는 서로 알아보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곳에서 만난 동물과 인간 간의 관계, 그리고 생태계에 대한 사유를 게임 메커니즘으로 은유하여 표현하였다. 이에, 작가가 발견한 이야기인 ‘경계(또는 틈새)의 생태계’와 그 이야기를 담는 방식으로 선택한 ‘게임 매체’에 대한 이야기를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과 함께하고자 이소요 작가와 박이선 기획자를 초청했다. 이들은 융합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연구 내용을 다방면의 활동과 플랫폼으로 펼쳐보이는 창작자이다. 이소요 작가는 다양한 전시를 통해 인간과 생물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생물학과 예술의 학제 간 연구를 바탕으로 생물 미디어(biological media)에 대한 심도 깊은 작품과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인류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동시대 시각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비평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박이선 기획자는 문화연구를 전공한 게임연구자로, 게임과 플레이어에 대한 글을 쓰고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그는 게임 화면 속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과 동시에 게임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는 다양한 연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연구자이자 창작자인 2명의 필자와 나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구성으로 전시에 대한 각자의 관점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1. 작가는 동시대에 대해서 어떤 태도와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2. 그 시선 끝에서 발견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3. 그 이야기를 담고, 표현하는 매체로 무엇을 선택했으며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가, 그리고 더나아가 4. 그러한 작가의 선택들이 관람자에게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 

    1. 작가의 태도와 시선 _ <경계 산책자, 룹앤테일>, 이다영

    룹앤테일은 ‘경계를 산책하는 경험’에서 시작한 이야기로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단어는 ‘경계’와 ‘산책’이다. 작가는 ‘경계’의 의미를 3가지로 이야기한다. 첫번째는 도시와 자연 사이의 중간지대에 있는 생태적 공간, 두번째는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시간인 자정, 그리고 세번째는 그 경계의 시공간에서 서로를 알아보지만 적정한 거리를 두며 공존하는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럼 경계를 ‘산책’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산책’은 둘러보고 관찰하고 사유하며, 그것들이 경계에 있음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발터 벤야민의 ‘산책자(플라뇌르, Flâneur)’적 행위와 태도로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산책자’1 발터 벤야민의 ‘도시 산책자’ 개념은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The Flâneur>로 소개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윤미애의 저서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문학동네, 2020)에서 저자의 해석과 더불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한편,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반비, 2017)에서는 플라뇌르를 ‘어두운 밤길도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남성적 사유와 행동’으로 언급했다. 우리는 룹앤테일의 ‘경계 산책’이 작가에게는 특별한 경험과 사유를 제공한 행위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도시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목적 없는 산책뿐만 아니라, 도시를 이해하고 경험하기 위해 의도적 노력을 하는, 여유로운 관찰과 예민한 인식을 통해 도시와 상호작용하는 시민에 대한 개념이다. 그는 산책자를 근대 도시에서 아주 중요한 구성원으로 보았다. 벤야민이 이 개념을 구상한 19세기 파리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근대화된 도시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의 산책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공간인 대형 백화점, 아케이드, 광장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탐구하기 위해 다양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의 관찰, 경험, 사유, 해석은 도시를 겉으로 보이는 물리적 구조 측면을 넘어, 숨겨진 얼굴과 표정까지 포함한 문화적, 역사적 층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시사하며, 도시의 성격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는데 중요한 행위이다. 

    앞서 언급한 도시의 산책자로서 도시를 관찰하고, 사유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점이 되는 몇가지의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20세기 중반 도시 계획과 디자인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영국의 건축가 고든 컬렌(Gordon Cullen)은 그의 도시 공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한 다큐멘터리 <타운스케이프(Townscape)> (1990)에서 도시를 관찰할때 다음과 같이 4가지 질문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①그곳에 누가 사는가, ②그 도시의 리듬은 어떠한가(24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도시인가, 느린 시간 속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목가적인 마을인가) , ③그 도시의 성격은 어떠한가(관광지와 같이 외부인에게 친근한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규칙이 엄격한가, 또는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위협적인 곳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④내가 여기에 속하는가. 마지막 네번째 질문은 관찰자의 시점을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환시키면서, 피상적인 관찰의 나열로만 그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그 시점의 경계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이는 장소에 대해서 더 깊이있고 풍부한 사유로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하며, 벤야민이 추구하는 ‘산책자’의 행위와 맞닿아 있다.  

    ‘경계’의 시간과 공간은 두렵다. 우리가 평소에 인지하는 생태계와는 달라 그 안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 알 수 없고, 자정의 어둠으로 그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룹앤테일의 ‘경계 산책’은 팬데믹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산책하려는 이유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시간이 지속되면서 서로 알아보기 시작한 다른 존재들이 생겼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관계를 통해 작가는 그 장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더 이상 두려운 장소가 아닌, 작가의 관찰과 사유를 직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었다. 작가의 이러한 ‘산책자’적 태도의 시선 끝에서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촉발된 것이다.

    2. 시선 끝에서 발견한 이야기 _ <틈새에서 마주친 사람들>, 이소요

    “알아봄(recognition)”. 2023년 가을, 태풍이 지나가던 오후, 잠실에 있는 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에서 만난 룹앤테일의 작품들2 2023년 9월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아트잠실에서 열린 룹앤테일 개인전 〈다리 밑, 0시, 알아봄〉을 구성하는 아트게임 작품들을 가리킨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담을 불특정한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여섯 개의 챕터로 구분하여 단계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작가 웹사이트에 전시와 작품 소개가 실려 있다. 룹앤테일, “Under the Bridge, Midnight, Recognition”, LOOPNTALE 룹앤테일 웹사이트, 2023년 12월 29일 조회, https://loopntale.com/ubmr/은 독립적이던 행위자3 이 글에서 행위자(actor)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에서 빌려온 용어로 행위성(agency)를 가지는 인간, 비인간 모두를 포함한다.들이 마주치며 서로의 시선에 들어오고 이윽고 알아보게 되면서 생겨난 삶의 변화를 다루고 있었다. 탄천 1교 “다리 밑”을 산책하던 작가가 어느 날 “0시”에 마주친 한 마리 들개를 “알아봄”으로서, 작가의 몸과 마음이 달라졌음은 물론, 그 경험을 담은 작품들의 설계ˑ형식ˑ내용을 아우르는 모든 요소들이 정해졌을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정치생태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2010년 저서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의 첫 단원에서 “thing power”, 직역하면 ‘사물의 힘’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4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2. 2020년 한국어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제인 베넷,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서울: 현실문화연구, 2020). 이 글에서는 번역서를 참고하되, 글쓴이가 원서를 번역하여 인용했다.. 이 책은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마주침의 유물론(materialism of the encounter)’이라 부른 신유물론 계보안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론적 탐구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저자가 실제로 마주친 사물들에 대한 반응으로 쓰여졌다. 베넷이 말하는 사물의 힘은 물질, 혹은 물성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실체로 응집되어 주관성을 가졌을 때 발생한다. 그는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집 근처 길거리, 즉 날마다 다니는 장소를 지나다가 문득 도로변 빗물받이에 걸린 사물들을 감지한다. 라지 사이즈 검정색 작업장갑 한 짝, 두텁게 엉겨 붙은 참나무 꽃가루, 흠집 없이 깨끗한 죽은 쥐 한 마리, 흰색 플라스틱 병뚜껑 한 개, 매끄러운 나무때기 하나.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던 이 사물들의 배치가 그날따라 저자를 부르는 힘을 가졌고, 인간중심이 아닌 또다른 세상,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분석할 수 없는 세상, 물질이 가지는 생동성을 체감할 수 있는 세상으로의 틈새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저자를 포함하는 이 사물들이 의도성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고, 우연이 반복되며 만나게 되었을 터이지만, 하나의 시간, 하나의 장소라는 특수한 틈새에서 마주친 서로의 존재를 헤아려보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을 것이다. 단지, 참나무 꽃가루가 엉겨 붙어 있었다면, 방금 봄비가 내렸을 것이며, 그 촉촉한 물과 흙의 내음이 저자를 사물들의 세계로 이끌었을 지 모른다.

    마주침의 유물론을 이야기한 알튀세르 역시 실체로 다가온 하나의 물질, 즉 떨어지는 빗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비가 온다. 그러니 이 책이, 무엇보다도,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5“It is raining. Let this book therefore be, before all else, a book, about ordinary rain.” Louis Althusser, “The Underground Current of the Materialism of the Encounter” in Philosophy of the Encounter: Later Writings, 1978-87, eds. François Matheron and Oliver Corpet., trans. G. M. Goshgarian, (London & New York: Verso, 2006), 167. 본문의 인용문은 글쓴이가 우리말로 옮겼다. 이 구절은 저자가 말년에 남긴 한 편의 원고를 여는 첫 문장이다.6 이 원고는 제목 없는 미발표작이었으며, 저자 사후에 “The Underground Current of the Materialism of the Encounter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동향, 글쓴이의 번역)”이라는 제목으로 각주 3의 편집서에 출판되었다. 낙하하는 빗방울의 세계와 만나면서, 알튀세르는 에피쿠로스가 세계의 기원을 설명한 문장을 체감하게 된다. 무수한 원자가 허공에서 수직으로 평행하게 떨어지다가, 우연한 교란에 의해 서로 부딪치는, 혹은 마주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최초의 마주침들이 연쇄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기에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각각의 빗방울이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하기 떨어지더라도, 미생물로 가득한 공기 생태계의 매트릭스를 교란하여 그 삶을 다채롭게 만들었을 지 모른다.

    룹앤테일이 어느 날 자정 탄천 1교 아래를 걷다가 한 마리 들개를 마주친 사건으로 돌아가, 이것 역시 반복되는 우연의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마주침이 있기까지 주어진 조건을 조금은 추적해볼 수 있다. 탄천1교는 서울시 지정 ‘생태·경관보전지역’7 생태·경관보전지역은 우리나라 자연환경보전법에 의거  원시성, 생물다양성, 생물대표성, 특수한 지질이나 지형, 수려한 경관 등을 갖추는 것으로 평가하여 보호하는 장소이다. “생태·경관보전지역”, 국가 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 2023년 12월 조회, https://www.kbr.go.kr/content/view.do?menuKey=454&contentKey=21.인 ‘탄천’ 즉, 송파구 탄천 2교에서 강남구 대곡교 사이 약 8km 구간에 속한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으면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하천과 녹지에 다양한 생물이 정착했다. 작가가 관계를 맺게 된 들개도 이 생태계의 구성원이었다. 사람의 손을 직접 타기보다는, 사람이 교란한, 즉 일부러 조성하고 바꾸어 놓은 환경에서 자생력을 가지는 행위자였다. 이 개는 사람에게 완전히 길들여 지기 보다 떠돌기를 선택했으나, 작가와 마주치면서 교감하였고, 일정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한 채 다리 밑 시공간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의도치 않게 탄천 근처로 이사한 작가는 일과 중 하나로 천변을 산책했고, 그곳에서 들개와 마주쳤을 때 ‘돌보아야 한다’는, 어쩌면 지극히 인간중심의 관점을 의식하며 이 행위자를 대하고 마주침의 내용을 결정해갔다. 들개에게 먹을 것을 주어 생존에 기여했고, 그가 낳은 일곱 마리의 새끼를 유기견 센터에서 구조하였고, 그 중 하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한 편 이러한 적극성이 일방적이었다고 비판할 수는 결코 없다. 마주치지 않아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을 고려하며 신중을 기하였으며 갈등 속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의식하며 마주침의 반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룹앤테일의 《다리 밑, 0시, 알아봄》을 구성하는 여섯 챕터는 서울의 탄천이라는 특수한 생태적 틈새(ecological niche)8 이 글에서는 ‘ecological niche’를 ‘생태적 틈새’로 번역하여 썼지만, 생물학 용어로는 ‘생태적 지위’이다. 농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稻垣榮洋)는 어떤 생물이 가장 높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영역으로 좁거나 넓을 수 있고 그 조건이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니치는 틈새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장은정 옮김, 식물학 수업(고양: 키라북스, 2021), 35.를 배경으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 틈새에서 마주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으로, 컴퓨터그래픽으로, 출력물과 모니터 화면과 사물로, 아이콘과 활자와 소리로, 그리고 이것들을 호출하여 연결하는 게이밍의 규칙들로 작가가 일생에서 경험한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그의 삶을 주마등을 보듯 들여다볼 수 있었다. 떠돌기를 선택한 행위자와 돌보기를 선택한 행위자, 이들이 서로를 알아채게끔 만든 사물의 힘, 그 힘으로 열린 마주침의 세상에서 작가는 이 만남을 겪고 다루면서 ‘그저 무엇에 관한 작품이 되기를’ 바랐을 지 헤아려보게 된다.

    3. 이야기를 담는 매체 설계 _ <작가의 이야기를 게임 세계로 구축한다는 것>, 박이선

    《다리 밑, 0시, 알아봄》은 룹앤테일이 2년 간 작업한 게임으로 구성된 일련의 이야기들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작가가 서울 탄천 일대를 산책해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긴 시간 동안 그곳에서 다양한 생물 종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느껴오며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얻은 책임감과 인간/비인간 사이의 ‘공존’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나의 세계로 구축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야기가 전달된다. 작가에게 남겨진 수많은 영상, 사진, 스크린샷, 녹음 등의 기록들은 게임의 재료가 되었다.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예술의 매체와 다르게, 게임은 감상자에게 행동을 요구한다. ‘보는 것’보다 ‘하는 것’이 작품 감상의 요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만을 고려한다면 해석의 층위는 단일해질 수 있다.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일 것이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어떤 규칙과 행동을 허용하는지에 따라 그 표현과 감상을 무한히 달리할 수 있다. 룹앤테일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각각의 작품마다 게임의 요소를 다르게 선택하고 배치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마치 우리가 생각을 표현할 때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게 게임에 어떠한 규칙이 주어졌는지, 데이터는 어떤 절차로 처리되는지, 캐릭터는 누구인지, 카메라의 시점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리고 컨트롤러는 어떻게 조작되는 지의 문제는 모두 다르게 설정이 된다. 

    이야기 방법으로서 규칙 설계. 그렇다면 매체로서 게임은 어떻게 하나로 정의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지론을 펼치고 있지만 그 중에서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의 정의는 가장 포괄적이면서 설득적이다. 그의 말을 가져오면, 게임이란 주어진 입력에 어떻게 반응할지 시스템적으로 설계된 ‘상태 기계(State Machine)’다. 상태 기계는 수학적 모델 중 하나인데, 예를 들어 전등이 하나 있다고 했을 때 전등은 두 개의 ‘상태’를 가진다. 꺼져 있거나 아니면 켜지는 것. 불 꺼진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은 ‘꺼짐’에서 ‘켜짐’이라는 상태로 이동해 빛을 밝히는 결과를 내보인다. 불을 켜고 끄는 행위는 전등 모델에서 미리 허용된 행위다.

    율의 맥락에서 게임도 전등 모델과 마찬가지로 행위와 상태가 규정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게임의 작동 방식은 ‘규칙’이다. 규칙은 데이터가 처리되는 메커니즘의 기계적인 의미를 더해 ‘메카닉’이라고도 불린다. 규칙은 감상자(플레이어)에게 허용되는 행위와 그에 대한 결과를 정하며, 플레이어는 가능한 행위를 통해 데이터에 변화를 일으킨다. 변화한 데이터는 게임의 규칙에 의거해 처리된 결과를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상태를 이동시킨다. 이것이 게임의 포괄적인 설명이며, 규칙은 게임이라는 매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룹앤테일은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허용의 기술>은 널리 알려진 ‘지뢰 찾기’ 게임의 규칙을 통해 공존이라는 가치를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지뢰 찾기는 격자형 보드의 땅에서 지뢰가 묻힌 지역을 찾아내고 그 위치를 피해 안전 영역을 선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만약 지뢰를 선택하게 되면 폭탄이 터지며 게임은 끝난다. 룹앤테일은 지뢰 찾기의 규칙을 유지하지만 전쟁에 비유하여 안전을 찾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는 정반대로 뒤튼다. <허용의 기술>에서 플레이어는 전쟁 지역이 아닌 여러 존재가 뒤섞여 공존하는 넓은 영토에서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분리해낸다. 위험/안전의 대립된 가치를 넘어서 인간/비인간과 같이 서로 다른 종의 영역을 이해하고, 상호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역 선별의 실패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허용을 실패한 것으로서 게임 오버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다른 작업 <피드(Feed) III + IV>는 자연 재해와 생존을 이야기하기 위해 캐주얼 게임 ‘타일 쌓기’를 사용한다. 플레이어는 하천의 범람을 피하는 식물이 된다. 한 장의 타일이 좌우로 이동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점프했을 때, 타일은 점차 쌓이며 안정적인 탑이 되어간다. 리듬에 맞게 점프하는 행동은 생존하고자 하는 식물의 몸짓이기도 하다. 자꾸 균형이 어긋나는 타일들처럼, 폭우로 잠겨버리는 낮은 지대로부터 인간이 견고하게 만든 교량까지 올라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또다른 작업 <경계 산책>은 ‘카드 맞추기’의 규칙을 가져온다. 카드 맞추기는 뒤집힌 카드가 순간적으로 앞을 보이는 순간을 기억하여 모든 카드의 짝을 맞추는 규칙을 가진 게임이다. 작가는 카드의 앞면에 탄천에서 지낸 기간동안 만난 유기견(또는 야생견) 등의 다양한 존재들의 이미지를 넣음으로써, 이 게임을 통해 순간의 조우와 기억하려는 실천을 이야기하게 된다.

    게임의 시점을 통해 말하는 각자의 ‘관점’. 모든 이야기에는 ‘시점’이 존재한다. 문학에서 시점은 이야기가 서술되는 발화자로서 일인칭 주인공, 일인칭 관찰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으로 나뉘며, 영화는 카메라의 위치와 움직임에 따라 객관적 시점과 주관적 시점 등으로 분류된다. 게임에서 시점은 일반적으로 일인칭 시점, 삼인칭 시점, 전지적 시점으로 구분하고, 사물의 투영 방식에 따라서 탑 뷰, 아이소메트릭 등으로 나뉜다. 특정 게임 장르를 뜻하는 ‘FPS’(First Person Shooter), ‘TPS’(Third Person Shooter)와 같은 용어는 봤을 때 게임에서 시점은 장르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에서 시점은 보는 것과 하는 것의 연계로 풀이되어야만 한다. 문학이 서술자의 언어를 토대로 시점을 만들고, 영화가 카메라의 시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면, 게임에서 시점은 카메라와 더불어 행위하는 대상의 의미를 더한다. 게임의 카메라는 조작 장치에 의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말하는가’, ‘누가 보는가’에 게임 세계와 조작 장치로 매개된 ‘누가 행동하는가’의 문제가 추가된다. 전지적 시점으로 오브젝트를 바라보더라도 행위로 인해 일인칭의 몰입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의 시점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그치지 않고,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를 체험하고 탐험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가 게임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 하느냐에 따라 게임 경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룹앤테일의 작업에서 주목할 수 있는 또다른 측면은 시점과 행위 간의 관계이다. 전시의 작업들은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행위가 관통 할 수 있도록 게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피드 (Feed)> 시리즈는 공통적으로 여러 개의 화면을 통해 게임이 전개된다. <피드 (Feed) I + II>는 세 개의 화면으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 화면은 도시를 떠도는 개의 모습을 비춘다. 마치 슈퍼 마리오처럼 땅을 오르내리며 목표물을 찾는 ‘플랫폼’ 게임 규칙의 개 캐릭터는 맵 전체를 뛰어다니는 조작을 통해 흩어진 목표물을 획득한다. 그리고 두 번째 화면은 첫 번째 화면을 더 넓게 조망하는 구도인데,  개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첫 번째 화면의 동일한 조작으로 먹이 모양의 퍼즐 게임이 펼쳐진다. 게임의 결과는 세 번째 화면에서 소셜 미디어 형태로 표현된다. 같은 시리즈의 <피드 III + IV> 역시 동일한 조작이 다른 게임의 시점을 관통한다. 식물에 포커스한 식물의 관점과 이를 먼 곳에서 바라보며 하천 주변 경관을 모두 담는, 어찌보면 인간일 수도 있는 또 다른 존재의  관점 화면으로 나뉘어 보여진다. 이러한 구성에서 작가가 고민했던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의 감각이 게임에서 보여지는 시점과 행위의 비대칭적인 구조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코드&카토그래피>에서는 플레이어는 다양한 시점의 지도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마치 ‘울티마’나 ‘드래곤퀘스트’ 같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미지의 지역을 탐험하며 숨겨진 길을 찾는 것과 유사하지만, 이 게임은 캐릭터가 지도 위에서 전투를 하거나 강해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게임은 세계를 탐색하는 행위 그 자체에 주목하며, 서로 다른 시점을 가진 각각의 지도는 각자의 탐험 규칙을 담아낸다. 플레이어는 세계의 규칙을 파악하며 이동하고, 동시에 이 움직임이 다른 존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게 된다. 룹앤테일은 다양한 존재가 가진 각자의 세계관을 시점과 행위를 교차해 탐색하고, 시각적인 요소로서의 게임 시점을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관점’으로도 접근하고 있다. 

    게임으로 ‘경험’을 플레이할 수 있을까? 게임은 전시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위치하면서 새로운 맥락을 얻는다.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게임에 참여 해야 하지만, 관객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나 수행 능력이 작품과 맞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게임이 튜토리얼을 통해 조작방법과 규칙을 소개하는 것처럼, 전시장에서도 감상을 위한 튜토리얼이 수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작품으로의 진입 장벽이 두터워지게 되면 작품과의 거리를 발생하면서 결과적으로 감상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전시될 때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는 짧은 시간동안 누구나 할 수 있는 규칙을 작업에 선택하거나 이미 널리 알려져 튜토리얼이 필요 없어지는 규칙을 차용하는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다. 

    룹앤테일의 《다리 밑, 0시, 알아봄》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고,익숙한 게임 문법을 통해 누구든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여 참여할 수 있다. 작가의 경험은 게임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와 오브젝트로 형상화되며, 설계한 규칙 또한 말로써 다 전달하지 못하는 복합적인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이 되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에게 허용된 행위를 토대로 시점을 획득하고 데이터가 처리되는 전체적인 진행을 따라 작가 자신이 되어보거나, 아니면 작가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아니면 그 외의 시점을 경험하기도 한다. 관객 또는 플레이어는 게임을 매개로 하여 작가와의 소통에서 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

    4. 작가를 떠나 관람객에게 _ <또 다른 ‘경계 산책자’에게로>, 이다영

    룹앤테일은 2023년 8월 탈영역우정국, 9월 아트잠실, 10월 제로원에서 각각 다른 작품과 방식으로 탄천에서의 ‘경계 산책’을 풀어내는 전시를 선보였다. 그 중 8월에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한 전시 《로(Ro)》를  《다리 밑, 0시, 알아봄》과 함께 관람객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로(Ro)》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획득한 ‘한밤중 탄천을 산책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에게 들려주고, 탄천에 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도시괴담을 만들게하는 메커니즘의 아트게임 전시이다.9 전시의 자세한 내용은 작가의 전시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https://loopntale.com/urbanlegend/ 작가가 탄천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전달하면 인공지능이 도시 괴담으로 생성하는 게임이라니, 전시를 관람하기 전에 문득, ‘괴담은 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졌다. 많은 괴담 연구에서 밝혔듯이 괴담의 생성과 전승은 사람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면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사고나, 억압과 통제가 작용하는 군대나 학교와 같은 장소, 또는 아직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어떤 것이 야기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에서 이야기가 생성되고, 구전(현대에는 소셜미디어)을 통한 사람들간 상호작용으로 이야기가 덧붙여 지면서 밖으로 퍼진다. 한 때, 도시에서 유행하던 괴담은 홍콩할매, 빨간마스크 처럼 ‘공포의 인물’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일상의 공간에 여러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괴담의 장소’가 중심이 되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10<뉴미디어에 나타난 현대괴담의 장소성 연구>(오정미, 한국구비문학회, 2022) 앞서 언급했듯, 자정의 탄천은 낯설고 두렵다. 그 장소에서 살고 있는 비인간 존재는 우리와 도시를 공유하면서도, 다른 시간과 공간의 층위를 영위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앞에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들을 향한 괴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전시 내 게임 작품 <위험한 오피스>와 <평화로운 황무지>를 플레이하다보면, 게임 공간 내에서 내 캐릭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위험한 오피스>는 계속 이어지는 방과 방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문을 열도록 되어 있고, <평화로운 황무지>는 길이 없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게 된다. 이러한 게임 공간과 플레이 간의 설계는 우리가 모르는 장소를 처음갔을때 처럼 두려운 감정을 일으킨다. 플레이어는 게임 공간을 헤매이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획득하고, 그 이야기는 인공지능에 전송되어 도시괴담의 재료가 된다. 게임 플레이 끝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괴담이지만 무섭게 다가오기 보다는,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을 돌아보게 된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 그 이면을 알고싶다’는 생각과 함께 게임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로(Ro)》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이야기로 생성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면, 그 다음에 전시된 《다리 밑, 0시, 알아봄》은 서로를 알아보게 된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 공존의 방법을 고민하는 전시로 이야기가 확장되었다. 관람객으로서 작가의 이야기 확장 단계를 함께 따라가 본 경험은, 작가가 구축하고자 하는 예술 세계의 맥락이 형성되어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탈영역우정국은 동시대 예술의 장소로, 전시 《로(Ro)》에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있는 예술계의 사람들이 주로 방문했다. 최근 인공지능에 대한 예술계의 관심도 높아진 터라, 작가와 함께 관련 담론과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양한 창작자들이 전시를 찾았다. 반면, 전시 《다리 밑, 0시, 알아봄》를 열었던 아트잠실은 전시 공간이 아파트 단지의 상가 건물에 있어, 관람객 중에는 동네 주민들이 있었다. 특히, 주변 학원가 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탈영역우정국이나 제로원에서는 전시를 통해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는 예술계의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면, 아트잠실은 동네 주민, 어린이, 중고등학생, 학부모의 방문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을 기반으로 ‘창작자 – 작품 – 전시 – 관람객’을 살펴보면, 관람객에 따른 반응의 다양성과 그 이유를 분석해볼 수 있다.11 1960년 야콥슨이 새롭게 도입한 이 개념은 의사소통에 중요한 전제 조건을 설명한다. 기존의 의사소통 모델에서 ‘맥락’과 ‘코드’를 추가한 개념이다. ‘맥락’은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상황, 문화, 장소, 시대 등을 이야기한다. ‘코드’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기호체계를 의미한다. 서로 상이한 코드에서는 메시지를 전달받기 어려우며, 발신자의 코드에서 수신자의 코드로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매체의 역사 – 동굴벽화에서 가상현실까지』 (저.안드레아스 뵌, 안드레아스 자이들러, 역.이상훈, 황승환, 문학과지성사, 2020) 아래 도식에서 발신자는 작가로, 수신자는 관람객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본다면, 작가와 관람객이 공유하는 ‘맥락’과 ‘코드’가 많을 수록 메시지는 더 수월하게 전달된다는 점을 도출해볼 수 있다.

    로만 야콥슨의 의사소통 모델

    탈영역우정국에서 만난 관람객들과 작가는 주로 ‘동시대 예술’에 대한 맥락과 코드를 공유할 것이다. 발전하는 기술 속에서 변화하는 예술의 형태와 표현 방법,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담론이 도출되는 상황(맥락)과 그것을 설명하는 예술계의 언어(코드)를 공유하며, 그 속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한편, 아트잠실을 찾은 지역 주민들은 전시 공간과 가까운 ‘탄천 생태경관보전지역’에 대한 이해가 높아 게임 속에 등장하는 공간과 상황에 보다 더 공감할 수 있다. 이 맥락이 작가가 탄천과 가까운 장소에서 전시를 한 이유지만, 실제 찾은 관람객은 지역 주민들 보다는 룹앤테일의 ‘아트게임’에 관심있어서 방문한 관람객이 더 많았다. 이렇듯 메시지의 발신자인 작가가 의도하고 제공하는 전시의 맥락도 있지만, 수신자인 관람객의 입장에서 형성되는 맥락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룹앤테일의 김영주 작가는 201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에서 진행한 아트게임 창작 워크숍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게임메이킹>에서 “누구나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에서 할 수 있는 행동과 규칙을 설계하며, 마지막에는 서로의 게임을 함께 플레이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을 8회에 걸쳐서 진행했다. ‘누구나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음’은 게임이 어떤 특정 세대나 계층이 점유하는 매체가 아닌, 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하는 말임과 동시에,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게임을 이야기하지 않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룹앤테일의 교육 활동은 작품이 전시를 통해서 관람객(플레이어)과 만나는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창작 세계가 형성하는 맥락과 코드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람객의 층위를 넓히고, 또다른 현실이 된 게임을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사유의 형태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활동이다. 룹앤테일의 장소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발견하는 관점이 더 많은 ‘경계 산책자’에게로 확장되길 바란다. 

  • 전시 기반의 게임을 만드는 일 (인터뷰, 월간미술)

    월간미술 2023년 8월호. [뮤지엄에서의 게임 그리고 플레이] 특집

    인터뷰 기사. 하도경 기자.

    룹앤테일(Loopntale)은 김영주, 조호연으로 구성된 게임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듀오다. 비디오게임, 인터랙티브 시뮬레이션, 관객참여극, SNS를 활용한 공동 창작 등 다양한 플랫폼과 장르에서 게임 메커닉의 실험을 기반으로 작품을 구현한다. 개인전 《Ro》(탈영역우정국, 2023)를 비롯해, 참여 전시로는 《Collective Worldbuilding》(HEK 바젤, 2023), 《언폴드엑스》(아시아문화전당, 2022), 《Hybrid by Nature》(독일문화원, 2021), Play Societies (베이징 현대모터스튜디오, 2020), 《States of Play》(FACT 리버풀, 2018) 등이 있다.

    게임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김_이전까지 저희는 저희를 게임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는데 요즘에는 작가라고 소개해요. 그 이유는 일단 게임을 만든다고 하면 “만든 게임은 어디서 다운 받을 수 있어요? 앱스토어에 있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듣다 보니. 그때마다 저희는 플랫폼이 다르다고 말해요. (웃음) 예를 들어서 영화의 경우 이미 상업 영화가 무엇인지 대중들의 머릿속에 있고 독립 혹은 예술 영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나 다른 기대치가 있고요. 그런데 게임은 다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저희는 전시 기반의 게임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관람자들에게 경험을 만들어주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모바일로는 출시 안 하냐고 늘 물어봐요. 이는 저희에게 다른 맥락인데 말이죠.

    작업 과정에 대해 들려주세요. 

    조_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작업에 착수해요. 리서치 주제들이 그때그때 있는데 또 꽂히는 것들이 있어요. 그 부분을 제일 잘 담을 수 있는 메커닉이 뭔지를 가장 먼저 정해요.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저희는 전통적인 게임 메커닉들 중 어떤 플레이 방식이 저희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매개하는데 어울릴까 고민하죠. 이를테면, 일상에서 대화하는 방식이 다양한 것처럼 스토리 비중이 강한 어드벤쳐 게임들은 주로 할 말이 많아요. 즉 플레이어에게 말을 많이 거는 게임, 들어주는 게임 등 게임의 대화법이 다양해요. 물론, 게임 메커닉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산업마다, 디자이너마다 정의하는 게 다르긴 하지만 저희는 다양한 문법들, 대화법에 대한 것을 메커닉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김_게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플레이될 건지 확실하게 정하지 않는 이상, 전시용 게임을 만들 때는 어려운 점들이 좀 있어요. 특히 저희는 멀티플레이 게임을 많이 만들어왔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약간 주춤하긴 했어요. 입장 제한 인원이 생기면서 그때부터는 싱글 플레이를 만들게 됐죠. 멀티플레이 게임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게 미술관에서 서너 명을 한 번에 모아 플레이하게 하는 과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한 사람이 플레이하고 나가고 또 다른 사람이 중간에 껴들어서 플레이하고 나가도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었어야 되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는 게임을 선호하게 됐어요. 

    작업 과정에서 어떤 점을 특히 신경 쓰나요?

    조_게임 하는 시간이 최소한 어느 정도 걸리는지에 대한 가이드를 관람자에게 주지 않는 이상, 너무 오랜 기간을 붙잡아 놓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플레이 타임이나 루프 되는 시스템 등이 중요한 것 같아요. 게임이라는 대상은 게임 메커닉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예를 들어 게임을 할 때 우리가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어떤 키를 눌러야 점프하고, 앞으로 가는지 등에 대한 거요. 인터페이스가 복잡한 게임의 경우, 사람들이 이해해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되도록이면 1분 정도 내에 이해되는 방식으로 만들려고 해요. 전시 공간에서 따로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튜토리얼을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사람들이 그냥 바로 플레이 하면서 보는 거기 때문에 굉장히 고려를 많이 해야 해요. 

    김_인터랙티브한 방식으로 플레이 하면서 작업을 수용을 하는 거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는 누가 플레이를 할 건지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어요. 플레이 할 사람, 예상되는 관객층이 얼마만큼 인터페이스를 이해하고 컨트롤러를 이해하는가가 시작 단계고요. 

    플레이 해야 게임의 당위성이 생긴다고 보나요? 하지만 뮤지엄이라는 공간에서 플레이를 하기까지 제약이 많죠. 전시장에서 플레이 된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다고 보나요?

    조_이게 항상 고통스러운 문제인데요. 비단, 전시장만의 문제는 아니고 게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 것 같아요. 게임 방송을 요즘 굉장히 많이 보시더라고요. 저희는 거의 예능처럼 틀어놓거든요. 그렇게 유튜브로 게임 방송을 보다가 취향이 맞는 게임이 나오면 직접 사서 플레이 해요. 그렇지 않은 게임은 그냥 예능 보듯이 많이 봐요. 게임이라는 인터랙티브한 매체가 어떻게 보면 거기에 투자할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어야 되는 거예요. 

    김_미술관에 있는 게임들은 단순히 오락적인 시간을 보내는 거 외에도 메시지나 어떤 주제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고 싶어서 던진 장치들도 많잖아요. 사실, 저희는 플레이 안 할 사람들을 위한 작업을 마련해놓기는 해요. 영상을 따로 재생해놓는다거나 주로 많이 쓰는 방법이 SNS랑 연동하는 방식이에요. 저희가 이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전시장에서 플레이하지 않더라도 그 이면의 이야기를 보고 느끼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게임에 참여는 안 했어도, 스토리를 추적할 수 있고 일시적으로나마 커뮤니티가 구성되는 경험을 간접적으로라도 제공하고 싶어서요. 

    조_여기서 플레이를 한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범주까지 플레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컨트롤러를 가지고 가상 세계에서 플레이하지 않아도 어떤 환경 안에서 행위를 통해서 일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을 포함해서 저희는 게임 메커닉으로서 플레이라고 정의를 하는데요.

    김_전시 공간을 고려했을 때 오래 머물러서 플레이 하는 환경이 맞지 않을 수 있어요. 물론 게임이 엄청 재미가 없거나 어려워 보여서 관람자들이 플레이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것이 공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애초에 게임 자체가 의도했던 플랫폼과 타겟층이 분명히 있는데, 그곳과 다른 환경에 놓으면 당연히 플레이 하지 않을 확률이 높고요.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뮤지엄에 들어온 게임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

    김_플레이 안 했다고 그 게임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게임이라는 대상은 플레이 했을 때 느낌이 확실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전시장에서 아이들이 주저 없이 게임을 해보고 저희가 숨겨왔던 걸 발견하면서, 자신을 게임에 던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더라고요. 전시장에서 많은 분들이 게임 컨트롤러에 대해 낯설어하시는 상황을 보며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물론 저희가 가끔 게임 만드는 워크숍을 하면 학교에서 코딩 수업의 일환으로 게임을 만들어 본 중고등학생들도 〈오버워치〉, 〈롤〉 같은 특정 장르의 게임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는 해요. 그때 게임이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입견도 여전히 뚜렷하다는 체감을 하게 돼요. 그 맥락에서 뮤지엄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 또 있는 것 같아요. 

    조_저희는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열심히 작업하고는 있는데 ‘과연,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만드는 게임이 들어갈 가장 이상적인 공간인가?’라는 질문을 늘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일 나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단 읽어봐 주려고 하는 관객들이 있는 것이 커요. 만약 플레이하지 않더라도 플레이하는 누군가를 유심히 보면서 읽어봐 주려고 하는 거요.

  • 룹앤테일론 (오영진, ZER01NE Archive)

    ZER01NE 제로원 아카이브 2021

    오영진

    룹앤테일론: 당신이 두 번째 구역을 열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전달되었습니다.

    익명의 동물들과 함께 쓰기.

    룹앤테일(김영주+조호연)은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시기, 집안에 갇혀 있던 익명의 유저들을 모아 각자의 우울증 경험을 드러내는 실험적인 온라인 워크숍을 한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했는데 구글 독스로 공유문서를 만들어 그들을 접속시키고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놔 둔 것이다. 공유문서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경우 문장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이 되며, 하나의 논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제각각의 생각들이 화면 모든 곳에서 전개되는 장관이 펼쳐진다. 본래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이 어원 상 각인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그래서 우리가 문자기호와 인격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즉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아효능감이 바닥을 친 사람에게 쓰는 일은 단지 내면을 표현하는 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라인 공간에 각인하는 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아바타로 등장해 자유롭게 활보했다. 공유문서 상에서 익명의 유저들은 익명의 악어, 익명의 아르마딜로, 익명의 오소리, 익명의 비버 등으로 표현되어 화면 안을 가득 채우는데, 작가는 이 장면이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울렸다고 증언한다. 함께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이양될 필요가 있다. 이름과 소속, 성별 등의 인간적인 요소들은 우리를 함께 만들기보다는 서로 구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평평하게 다시 재창조되고, 익명의 아르마딜로 같은 새로운 명명을 받을 때 그들은 기꺼이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다. 코로나블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인간의 가면을 버리고 동물들의 가면을 쓰면서 더 적극적으로 함께 만들었던 것이다.

    도나 헤러웨이는 저서 <Staying with the Trouble>(2016)에서 북극의 이누이트 족의 설화와 관습을 담은 게임 <Never alone>(2014)을 논평하면서 게임 내에서 인간인 플레이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주변환경과 동물들과 함께 해야만 클리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게임디자인이야말로 전형적인 인간성을 넘어서 그 외 존재들과 ‘함께 만들기’ 즉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태도라고 말한다.

    당신이 두 번째 구역을 열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전달되었습니다.

    룹앤테일의 최신작 <Mechanimal>(2021)은 비인간 객체들에 대한 탐구와 온라인 공간 속에서 익명성을 통한 ‘같이 있음’의 문제를 고민한 아트게임 작품이다. 관객인 플레이어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3D공간에 접속하게 되는데, 이 곳이 누군가의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문서를 읽어볼 수 있는데, 도나 헤러웨어의 <반려종 선언>의 문장이거나 이 실험실의 주인이 연구하던 어떤 종에 대한 단서들임을 확인한다.

    <Mechanimal>은 전통적인 어드벤처 게임의 문법을 차용하면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고의적으로 헤메도록 만든다. 일반적으로 어드벤처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모험의 본질이란 wasd키로 상하좌우, 게임적 공간을 훑어대면서 숨겨진 문서나 아이템을 찾고 이들을 엮어 어떤 이야기를 추측하고 체감하는 일이다. 지속적으로 게임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의 조각들을 제공하면서 미스테리한 톤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룹앤테일의 게임디자인은 실험실 주인의 실종이라는 테마로 플레이어에게 추리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추리극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게임적으로 기능하는 장치일 뿐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실험실 주인의 실종 테마는 맥거핀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인간형 객체는 고의적으로 실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간 안을 탐험하면서 겪는 경험이다. 플레이어로서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말해 보겠다. 작품 설명에 “웹브라우저 게임 + 트위터 연동”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아이디 Mechanimal의 트위터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게임 공간의 퍼즐을 풀자 한 8초정도 딜레이가 생긴 다음 필자의 화면이 Mechanimal 계정으로 공유되었다.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우선 내가 트로피를 획득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서의 탐험경험이 무(無)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 말고도 다른 두 명의 존재를 이어 확인했다는 것이다. 한 명은 접속의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입장시킨 필자의 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혀 모르는 익명의 존재였다. 필자가 한 공간을 해금하자 그들도 각자 자신의 해금 소식을 알려왔다. 게임 공간 안에서는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지금 여기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트위터에는 ‘당신’이라는 익명으로 표현되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당신’들 이었다. 이 기묘한 동거의 방식은 이 게임공간의 주된 정조인 멜랑콜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갑자기 그들과 기꺼이 협력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것은 목적이 있는 협력이 아니라 목적이 없는 협력, 협력의 충동같은 것이었다.

    비밀스럽게 공간을 해금했지만 그 사실이 트위터로 온 천하에 중계되는 순간 나 자신은 온라인 공간에 공식적으로 각인됨으로써 어떤 가치를 얻게 된다. <Mechanimal>이 차용하는 방탈출이라는 익숙한 형식은 큐브화된 공간에서 현대인의 고독한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무조건 탈출하고 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 레벨업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어쩌면 의미없는 게임 플레이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많은 예술가들이 게임엔진이라는 새로운 표현도구를 사용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것이 이 지점이다. 게임적 양식과 기술을 사용해 가상의 현실을 구축하지만 그 가상적 게임공간 안에 플레이어를 가두어 버리고 플레이어가 게임 밖으로 사유할 여지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룹앤테일은 방탈출이라는 장르를 익명의 유저와 같이 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그것을 게임 밖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무기력화된 개인들을 익명의 공동적 존재로 호출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반려종들을 생각하기.

    <Mechanimal>의 플레어들은 총 4개의 스테이지를 탐험하면서 그 공간의 의미와 그들이 찾고자 하는 비인간종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각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화분식물

    지하철의 비둘기

    수족관 잉어

    주차장의 고양이

    Mech+animal이라는 작명을 통해 뭔가 미래적이고 기괴한 비인간종을 보여줄 것처럼 보였지만 실종된 실험실 주인을 찾는 모험은 플레이어가 경험한 게임공간과 객체들이 이미 우리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존재들임을 깨닫게 되며 끝난다. 언뜻 게임에서 언급된 화분식물, 비둘기, 잉어, 고양이 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보면 도시생태계에 기생하는 존재이거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들은 인간종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도리어 그들이 있기에 인간종이 존립하는 상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비둘기나 고양이가 물질순환적 측면에서 도시생태계에 관여하는 바는 연구되지 않았지만 대충 그 규모와 위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도시의 어떤 인위적인 시스템보다 강력한 기능을 가진 객체들이다. 반려종은 애완종이 아니며, 되려 그들이 인간을 애완종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위와 같은 존재들은 외계인만큼이나 경이로운 존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Mechanimal>의 플레이 경험은 ‘나 자신’이라는 감옥을 탈출할 것을 요청한다. 이 감옥을 탈출할 때, 내가 아니라 우리가 가능해지고, 인간종으로서 우리가 아니라 모든 존재로서의 우리가 가능해진다. 코로나19로 자폐적 공간으로 도피가 강제된 인류에게 필요한 질문이자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은 사소한 작가 개인의 체험과 내면에 그 기원을 둔다. 인터뷰 중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은 저 화분식물은 제가 독일에 두고 온 반려종이어요.

    이 작품을 통해 그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아트게임 장르의 작품으로서 <Mechanimal>을 평가하자면, 이 작품은 게임을 예술적으로 꾸미는 일이나 게임문법의 예술적 전용이 아니라 게임이 그 자신의 강요된 매체성(오락성, 가상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는 지를 탐구함으로써 게임에 대한 메타적 시야를 제시한다. 사색적 게임이란 단지 게임 내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밖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함을 룹앤테일은 주장한다. 사소한 구글 독스의 공유문서 경험조차 작가의 눈에선 경이로울 수 있다는 점, 또 그 경험을 본격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Mechanimal>은 게임에 대한 실험을 넘어서 디지털 공간에 대한 모종의 실험으로 보인다.

    오영진.

    연세데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아트과 객원교수.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평론가,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21.06~19)를 연출했다.

  • 마이폴리오 (CA Magazine)

    CA #236(2018.1-2월호)

    작품 소개를 부탁합니다.

    Layers of Reality는 플레이어가 다수의 캐릭터들을 자유롭게 번갈아 플레이하며 얻은 정보들을 비교하면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3D 퍼즐 게임입니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사건에 대해 가진 입장이나 정보, 각자의 목표에 대한 성공과 실패는 상대적입니다. 플레이어는 하나의 시점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경험할 수 있고,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을 통해 게임 세계는 다각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시간대를 이동하는 플래시백 오브젝트가 있어서, 공간과 캐릭터는 각각의 시간대에 따라서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도 합니다.

    <Layers of Reality>에서 코딩 작업뿐만이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도 작업하셨습니다.

    팀으로 작업할 경우에는 다른 그래픽 디자이너와 작업을 하지만, Layers of Reality와 같은 개인 프로젝트를 할 때는 프로그래밍, 3D와 2D 그래픽 등 거의 모든 것을 혼자 합니다. 유니티3D 게임엔진과 블렌더3D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주로 작업을 하고 2D 인터페이스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사용합니다. 3D 게임의 그래픽 디자인은 공간 구성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플레이어의 동선을 유도하거나 예측하면서 게임 오브젝트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고민할 뿐만 아니라 멈추어 서게 될 지점에서 무엇을 보게 할 것인가도 생각합니다.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더라도 원경에 배치한 그래픽 요소들이나 조명은 스토리를 전달하거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픽 컨셉을 잡을 때는 영화나 미디어아트와 같은 다른 장르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Layers of Reality에서는 다수의 캐릭터를 전환하는 플레이어의 공간 인식을 돕기 위해 벽이 보이지 않고, 캐릭터들의 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오브젝트만 미니멀하게 배치했는데, 영화 도그빌과 연극무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작업하실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게임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두 가지 동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게임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게임 매커닉을 실험하고자 할 때입니다. 아트 게임이나 퍼스널 게임이라고 주로 통용되는 대안적인 게임에 관심이 많아서, 저의 작업도 게임 같지 않고 실험적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습니다.

    현재 독일에서 게임 개발자 겸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한국과 차이점이 있나요? 디자이너님께서 깨닫거나 배우게 된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쾰른에 있는 작은 게임 스튜디오에서 개발자 및 게임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보드게임 문화가 여전히 강하고, 트렌드를 재빠르게 쫓아가기보다는 느리고 다양하게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다루고 있다고 느낍니다. 게임을 만드는데도 다양한 태도와 방향이 있는데 저와 비슷한 게임 개발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또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알려주세요.

    개인적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대안적인 게임을 알리고 관련된 담론들을 만드는 다양한 방향 – 워크숍이나 출판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의 게임메이킹, 개인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드는 퍼스널 게임 메이킹 워크숍을 한국에서 한 달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봄에는 영국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기간 동안 비슷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Layers of Reality를 전시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