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가영
1. 형식으로서의 에세이
“에세이는 아담과 이브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것이 논하고 싶은 것으로 시작한다. 즉 무엇이 문제라고 말을 시작하고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멈춘다. 그러니 에세이는 이상한 것들로/사소한 노력으로 분류된다.”
(T. W. 아도르노, 「형식으로서의 에세이」, 번역 이여로)
아도르노에 의하면 에세이는 이미 축적된 체계의 기원으로부터 설명을 시도하는 작업이 아니다.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가 아닌, 지금 여기서 발생한 우연한 접촉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멈춘다. 이러한 에세이는 어떤 총체적 완결성을 목표로 하기보다, 파편적 요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유의 움직임 자체를 붙잡는다.
나는 에세이 형식을 이끄는 우연한 접촉을 전시장에 놓인 게임 작품을 마주치는 순간과 겹쳐 떠올린다. ‘전시된 게임’ 을 할 때 플레이어는 대개 게임이 이미 펼쳐진 와중에 불현듯 진입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지점에서 멈춘다. 물론 사전에 설정된 시작과 끝의 전체 사이클을 온전히 수행할 수도 있지만, 전시장에서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 설령 그것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 ‘도중에 시작하고 도중에 끝내는 선택’ 에 구조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전시장이 과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한 곳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우리는 게임이 ‘몰입적’이라고 흔히 말한다. 안과 밖, 시작과 끝의 경계를 이루는 ‘매직 써클’ 내에서의 강도높은 몰입 경험은 게임 매체만의 특성이다. 하지만 애초 몰입이라는 목적 없이 만들어진 게임이라면 어떨까? 무수히 분산된 접촉점을 장려하는, 처음과 끝의 온전한 플레이를 유도하는 대신 자유롭게 멈추고 떠나는 선택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을 언어로 삼아 만들어진 게임말이다. 이 때 플레이의 멈춤은 불완전한 감상도, 게임을 만든 이들의 노력을 배반하는 선택도 아니다. 역으로 이것은 그 노력에 대한 응답이 된다.
나아가, 파편적인 게임 경험은 어쩌면 게임 작품의 제작-전시-플레이를 관통하는 ‘에세이 형식’을 드러내는 사건일 수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사유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에세이 읽기, 쓰기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을지 모른다.
룹앤테일은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에세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왔다. 특히 비인간 객체의 삶을 다룬 〈Feed〉(2025)는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에세이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나는 아도르노의 에세이론을 바탕으로, 〈Feed〉를 에세이 게임으로, 사적인 고백이나 자전적 내러티브의 형식에만 한정되지 않는 매체 자체의 사유적 실천으로 논해 보려 한다. 이 글이 게임 플레이와 창작 과정 속에서 ‘에세이성’ 의 발견을 가능하게 하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에세이 게임’ 만이 말하고 만들어내고,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을 함께 더듬어 보고자 한다.
2. 에세이 게임
에세이 게임이란 무엇인가? 룹앤테일은 근래의 작품과 프로젝트에서 에세이와 관련된 개념 및 설명을 제시해 왔다. 이 때의 에세이는 사적 경험을 게임을 통해 기록하는 방식이자 작품이 다루는 대상 및 주제에 대한 연구, 리서치 방법론으로, 특히 인터랙티브 비디오 에세이 형식에 대한 탐색과 그것의 게임적 구현을 포괄한다.

《사적 게임 아카이브》1(2025)는 룹앤테일의 리서치를 플레이북과 에세이 비디오로 모아 제시한 프로젝트로, 에세이를 아카이브의 방법이자 형식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에 공개된 <플레이 비디오 시리즈>(2024)는 ‘에세이 게임에 대한 게임 에세이’의 성격을 띠며, 에세이적 태도와 접근, 그리고 그로부터 구성된 게임 경험을 비디오 에세이로 풀어낸다. 또한 근래에는 모듈 글쓰기와 게임 플레이를 결합해 ‘플레이어블 에세이’를 개발하는 <모듈창작 워크숍>2 (2025)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Feed〉 역시 룹앤테일의 게임을 통한 에세이 연구, 혹은 ‘에세이 게임’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룹앤테일이 에세이를 호명해온 방식과 별개로, 에세이 게임이라는 용어는 고정된 장르나 학술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맥락에 따라 게임 연구자 및 커뮤니티에서 느슨하게 호명되는 표현에 가깝다. 때로 이 용어는 사적인 고백이나 자전적 경험을 다룬 내러티브 게임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퍼스널 게임(personal game)3’으로도 불리는 이 게임들은, 제작자의 개인적 경험과 정서가 최소한의 상호작용 속에서 응축된 ‘퍼스널 비네트(personal vignette)’ 형태로 구현되기도 한다. 이때 게임 작업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나의 경험’으로서 구성하고 전달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한편 사적인 내러티브, 혹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에세이 게임을 비판적 매체이자 연구 실천으로 다루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스테파니 더 스말레는 ‘게임 에세이(game essay)’를 매체 비평을 위한 상호작용적 시청각 형식으로 정의한다.4 동시에 그는 게임 에세이를 하나의 결과물로서만이 아니라, 제작을 통해 사유하는 수행적, 상황적 실천으로 다룬다. 이때 게임 에세이의 제작은 특정 디자인 도구와 그 어포던스를 사용하는 일이 어떤 함의를 만들어내는지 연구자가 스스로 되짚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세이 게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게임의 가치가 플레이 순간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제작 과정 역시 게임을 통한 경험의 핵심 국면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세이 게임’을 둘러싼 논의 및 실천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본질적 특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그것은 게임을 만드는 이의 창작 과정과 플레이어의 경험이 각각 하나의 작품에서 어떤 형태로 만나는가, 혹은 만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응답하는가 하는 것이다. 창작 과정의 경험은 플레이 단계의 게이머에게 명시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플레이는 항상 총체적이 아닌 파편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이 때 플레이의 파편성은 머물고 떠남이 반복되는 전시 환경의 특수성만이 아닌, 항상 각기 다른 경로로 분기될 가능성을 지닌 게임 플레이 자체의 특성과도 관련된다.
나는 제작 단계의 경험과 플레이 경험이 〈Feed〉에서 즉각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만난다고 보고, 그것을 게임의 ‘에세이성’의 발현, 즉 에세이 게임의 작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플레이의 파편성은 아도르노의 ‘에세이 읽기’ 와 같은 내적 운동을 촉발시키고, 매체와 씨름하는 수행적 놀이로서의 게임 제작은 ‘에세이 쓰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 및 쓰기는 〈Feed〉가 다루고 있는 비인간 객체의 삶과 재현 방식, 만남의 윤리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형식으로 위치지어진다.
3. 우연의 놀이, 전시장의 〈Feed〉
먼저 시선을 〈Feed〉가 설치된 전시 현장으로 옮겨, 관객의 플레이 경험이 어떻게 ‘에세이 읽기’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Feed〉(2025)는 ≪UNFOLD X 2025 Let Things Go – 관계들의 관계≫가 열린 문화역 서울284에서 선보인 게임이다. 한국의 근대적 장소성이 깃든 공간과 첨단 기술 기반의 대형 설치 및 조형 작업이 융합된 전시에서 〈Feed〉는 ‘끝방’과 같은 장소에 위치해 있다. 많은 관객들이 앞서 본 작업들이 남긴 강렬한 인상을 몸에 담은 채 이 작품과 만난다. 다른 작업들이 기술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세계의 감각을 보여준다면, 〈Feed〉는 ‘이미 있는 세계’를 어떻게 다르게 감각할 것인가를 묻는 작품이다.
줄지어선 아케이드 머신 속에서 전자음이 흘러나오는 오락실도 아니고, 가정용 게임 콘솔과 퍼스널 컴퓨터가 놓인 익숙한 집 안도 아니다. 휴대용 콘솔을 들고 대중교통 좌석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는 출퇴근길과도 다르다. 〈Feed〉가 놓인 설치 공간 안의 조명은 어둡고 어딘지 사이키델릭하며, 바닥에는 마른 나뭇잎들이 반짝이는 인공조명을 머금고 뒹굴고 있다. 관객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두 대의 스크린이 비스듬히 모래주머니로 만들어진 의자를 향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커다랗고 투박한 게임 패드가 놓여 있다. 마치 “여기에 앉아 시작하라”는 신호 같다.
관객이 패드를 조작하기 전에 이미 게임은 스스로 펼쳐지고 있다. 스크린은 도심에 위치한 탄천을 무대로 도심과 바깥의 경계 위를 떠도는 비인간 개체들을 비춘다. 하얀 개가 풀숲의 고라니를 맞닥뜨리고, 붉은 귀 거북이 퍼즐에 몸을 맞추며 무분별한 방생 이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길을 찾는다. 패드를 주워 들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면, 플레이어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세계 속 무수한 접속 지점에 끼어들어가듯 게임 속 대상을 움직일 수 있다. 대상이 ‘되는’ 감각보다는 단지 ‘조작하는’ 감각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Feed〉가 하나의 ‘몰입적 경험’으로 정돈되기보다는 파편적인 마주침과 시점의 변화, 계속해서 갱신되는 게임의 규칙 속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전시장에 놓인 두 개의 스크린은 하나의 화면 내부를 곧 하나의 세계로 안정화하는 통상적 게임 인터페이스 감각을 지속적으로 교란한다. 메인 화면이 나의 조작에 반응할 때, 옆에 놓인 길쭉한 전광판 형식의 두 번째 화면에는 화자와 수신자가 특정되지 않는 텍스트가 흘러가거나 제3의 시점으로 게임의 세계를 렌더링한 화면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시각 정보는 플레이어를 재차 덜컹거리는 공간감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러한 교란은 단지 시각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게임의 규칙 또한 급작스러운 갱신의 대상이다. 메인 화면이 플레이어가 움직이는 오브젝트-화분을 스크린 중앙에 비출 때, 두 번째 화면은 돌연 화분을 향해 어디선가 다가오는 상자의 시점샷으로 변경되어, 인식 범위 바깥에 있던 객체-상자를 전경화한다. 플레이어는 이러한 전환을 알아채고 갑작스레 바뀐 게임의 규칙에 적응해, 상자의 움직임에 맞춰 화분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처럼 〈Feed〉에서 규칙의 발견은 어긋남의 발견과 겹쳐진다. 일반적으로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게임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통달하는 과정을 전제한다면, 〈Feed〉에서는 통달할 수 없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통과하는 것 자체가 플레이의 과정이 된다.
이 상황은 확률적 무작위(random)가 아닌, 조건적 우연(contingency)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조건적 우연은 맥락적 조건에 의해 특정 사건이 지금 나에게 마치 우연과 같이 도착하는 감각을 말한다. 탄천이라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인식하고 그들과 관계 맺는 과정을 구현하기 위해, 〈Feed〉는 무의미한 랜덤 인카운터도, 그들의 궤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착해 따라가는 공감적 동일시도 제안하지 않는듯 하다. 대신 연속적인 인터페이스, 규칙, 맥락의 흔들림 속에서, 매번 미처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사건을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듯한 느낌 – 우연적 감각이 펼쳐진다.

도시에서 길고양이나 고라니를 마주치는 것은 순전한 운일 수 있지만, 확률적 수치로는 존재들 각각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접촉의 순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게임 속에서 거듭되는 우연의 느낌은 이 접촉 순간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소환한다. 특정한 지점들에서, 플레이어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 시도할 때처럼 연거푸 다른 상황 속으로 미끄러지는데, 그 곳에는 긴 숙련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 작은 미니게임들 – ‘우연의 놀이’ 들이 있다. 플레이어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새로운 놀이 시퀀스에 반사적으로 빠져들고, 그 틈새의 시간과 장소에 적용되는 규칙을 파악한 후, 비인간 객체를 움직여 통과한다. 이것은 탄천의 길고양이나 고라니 등 불현듯 마주친 생명체들과의 접점을 틈새적 장소로 새로 발견하는 과정과 닮아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들을 그저 지나치고 잊어버리는 대신, 다소는 임시변통일지라도 반복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이어나가는 공존의 방식 역시 떠올리게 한다. 길고양이를 몇 번 목격한 후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 구석에 사료와 숨숨집을 지어두고, 안부를 묻듯 자리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일상의 작은 루틴으로 만드는것처럼 말이다.
〈Feed〉는 진입과 이탈, 시점의 분열, 규칙의 갱신으로 이루어진 파편적 경험과 우연성의 놀이, 그리고 이러한 형태로만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사유를 발생시킨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파편성이란 결함이 아니라 전체라는 이름의 폭력에 저항하며 대상의 구체성을 보존하는 전략적 형식이다. 〈Feed〉를 통해 플레이어는 경계공간 속 비인간 객체의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를 엿보게 된다. 이 태도는 대상의 삶에 온전히 이입할 수 있다고 자부하거나, 그들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주려 하는 대신, 파편적이고 우연적인 감각 속에서 대상의 구체성을 보존하는 거듭된 노력, 에세이 읽기로 나타난다.
4. 이상하고 사소한 노동
그렇다면 게임의 제작 과정, ‘에세이 쓰기’는 어떤 경험을 발생시키고, 그것은 어떻게 관객의 플레이에 조응하거나 연결되는가? 앞서 스말레의 논의를 참조하여, 〈Feed〉의 제작 과정을 창작자와 게임 디자인 도구(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시간과 장소로 상상해 보자. 디자인 도구란 게임 엔진, 에디터, 코드와 에셋 파이프라인, (근래에 급격히 부상한 도구인) ai 등을 말할 수 있다.
하드-소프트-미들웨어 플랫폼은 게임의 물질적, 비물질적 기반이 된다. 플랫폼 기반과 창작자의 만들기 경험은 최종적 플레이 경험에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플레이 단계에서 플레이어가 마주치는 게임의 세상과, 창작자가 만들어내는 게임의 공간은 일종의 디지털 객체로서 동일한 에셋과 코드, 데이터의 결합물로 존재한다. 또한 창작자는 플레이 단계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게임의 절차적 과정 및 객체의 행위성을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 창작을 플레이를 산출하기 위한 목적외의 활동으로 간주한다면, 게임 만들기 역시 또 하나의 놀이로, 게임을 통해 발생하는 경험으로 바라볼 수 있다.
〈Feed〉의 제작에서 룹앤테일의 사적인 감정, 경험, 관계는 퍼스널 게임과 같은 서사적 전면화와는 다소 다르게, 환경이나 규칙 등의 요소로 작품에 기입된다. 이를테면, 〈Feed〉의 탄천은 룹앤테일이 실제 비인간 객체들을 마주친 장소로서 게임의 리소스가 된 이미지들을 직접 수집한 곳이기도 했다. 룹앤테일은 〈Feed〉의 탄천 공간-맵을 만들기 위해 사적으로 수집한 리소스를 3D 오브젝트로 전환해 배치하고 레벨 디자인을 수행했다. 또한 작가들에 의하면, 그 과정은 ‘노가다’ 이면서 동시에 감정적 위안을 주는 작업, 혹은 분노를 해소하는 하나의 길을 발견해간 과정으로 표현된다.
도심의 틈새 공간을 떠도는 개와 고라니, 고양이, 너구리, 그리고 무분별하게 방생된 붉은 귀 거북은 지배종인 인간에 의해 배려받지 못하는, 오히려 막연한 혐오에 노출된 대상이다. 나아가 생태학적 측면에서 유해조수로 분류된 이들의 삶은 학술적으로 데이터화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생명체들은 근방의 일부 거주민들에게는 생활권에서 서로 마주치고 삶을 나누는 이웃이며, 작가들에게는 기록되고 기억될만한 오랜 관계를 나눈 존재다. 룹앤테일은 〈Feed〉라는 게임 속에 이들을 기록하고, 이들이 플레이어와 더불어 세계를 재구성해나가는 상상을 구체화한다.
실물 대상을 3D 객체로 제작해 게임 내에 존재하게 만들고, 또 작동하게 하는 작업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더 높은 재현도를 가진 더 많은 객체를 레벨에 배치하는 것은 게임 무대의 포토리얼리즘적 묘사를 위한 것일 때가 많다. 하지만 룹앤테일의 ‘노가다’ – 제작 노동은 그러한 목적에 할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대상을 디지털 객체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AI를 활용했는데, AI로 인해 즉시 생성된 객체가 단순히 리얼리즘적 환영의 일부분이 되지 않도록, 시각적 구현 밀도 및 환경의 재현도를 높이는 목적과는 다른, 다층적이고 고유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했다. 즉 룹앤테일의 제작 노동은 데이터화 되지 않는, 기록될 이유가 없다고 말해지는 존재 및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기록하고, 그들과의, 혹은 그들 사이의 어울림을 우연의 놀이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작업을 위한 이상하고 사소한 것으로 분류될 강도높은 노동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말할 것이 있다는 감정의 강도에 조응해, 게임의 완성과 함께 그 느낌의 해소 또한 이끌어내었을지 모른다.
게임의 타이틀 〈Feed〉가 화면에 떠오른 후, 카메라는 멀리서 조망하는 구도로 전체 맵을 비추고, GPS 지도를 잘라 넣은 듯한 평면 이미지 위에 3D 오브젝트들로 일부가 재현된 탄천이 드러난다. 블루프린트 위에서 원하는 부분만을 살려낸 듯한 이 모습은, 실제 장소를 규범적 기준에 따라 ‘완전하게’ 재현하는 지도, 혹은 환경 보고서의 논리를 거스르는 이미지다. 또한 틈새적 공간과 그 안의 삶을 배제하고 완성되는 ‘총체적 관점’에 대한 반박의 전략으로서, 문제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시작하고,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멈춘, ‘에세이 형식’을 한 눈에 시각화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도의 이미지 속으로 카메라는 천천히 이동해,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하거나 지켜볼 수 있는 대상 – 한 마리의 하얀 개 앞으로 다가선다.
사적인 리소스를 디자인 도구와의 맞물림 속에 환경화하고, 게임의 규칙과 시점, 디스플레이 속에 객체와의 관계를 기입하면서, 〈Feed〉는 게임 에세이로 쓰인다. 유니티 에디터 및 AI툴과의 씨름 과정은 플레이어에게 투명하게 파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게임에 쓰인 ‘모든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게임의 에세이성에 어긋나는 목표가 아닐까? 각자에게 도착한 우연의 장면들로부터 자신만의 에세이 읽기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고 사유했던 것들과 공명할 길이 될 것이다.

〈Feed〉는 그렇게, 룹앤테일의 노동, 놀이의 쓰기와 플레이어의 파편적 읽기가 시간차를 두고 조응하는 에세이 게임이다. 〈Feed〉의 에세이성은 아도르노가 말한 것 처럼, 체계의 기원에 기대지 않고 지금 여기서 마주친 존재들의 구체적인 진실을 붙잡아 낸다. 이 때 한층 구체화될 존재란, 탄천 안의 생명체들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전시장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는 작품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작가가 만드는 순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채 게임 안에 기입된 감정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것은 우리가 형식으로서의 에세이 게임을 명명하고, 만들고, 플레이할 때 열릴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임가영은 워크숍, 퍼포먼스, 게임 장르를 리서치해 왔다. 예술적 사건이 조직되고 기록·공유되는 경로를 연구한다. 저서 『연속 종이: 비디오 게임의 죽음』(2025).
*아트인컬처 평론 프로젝트 ‘피칭’ 제30회 선정작 바로가기 →
- https://loopntale.com/research/ ↩︎
- https://loopntale.com/modulecreation/ ↩︎
- Henderson, Thryn & Iacovides, Ioanna. “It’s just part of being a person”—Sincerity, Support & Self Expression in Vignette Games. DiGRA 2020 Proceedings, 2020 ↩︎
- de Smale, Stephanie. “Game Essays as Critical Media and Research Praxis.” DiGRA 2016 Proceedings, 2016. ↩︎




















































































































































































































































































































